자연을 따라, 서천 갯벌로 떠나는 소리여행 🔊

세시간전 | 2022-02-20 08:00읽힘 1572

모두 이런 경험 한 번쯤 있지 않은가. 시계 초침 소리나 자신의 심장 고동이 들릴 정도로 조용한 공간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있으면, 예전 어딘가에서 본 풍경이 떠오르는 경험. 지난날 여행했던 해변가의 풍경에 좀 더 귀 기울이면 그때 들었던 갈매기와 파도 소리가 생생하게 되살아나며 당시 느낀 감정들이 떠오르는 그런 경험. 한 지인은 이야기했다. 퇴근 후 은은한 간접 조명으로 편안한 빛을 만든 뒤, 불교사원의 풍경이 담긴 음원을 들었다고. 개구리 소리, 계곡 물 소리, 내리던 비가 기와를 타고 바닥에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어찌나 아름답던지,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쉼의 시간을 갖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며 환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소리 여행

아마 우리가 여행지에서의 풍경을 떠올리는 이유는 분명 그곳에서 느꼈던 좋은 기억들 때문일 테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고 느낀 경험들은 마치 감각기관에 쓰인 내 안의 기록처럼 남는다. 그런 감각의 기억을 다시 새겨보고 그리워하며 우리는 소중한 여행의 기억을 보관하는 셈이다.

소리여행의 묘미

필자는 이처럼 여행을 다녀온 후 때때로 맞이하는 경험이 좋아, 자연의 소리가 담긴 음원을 담아 오는 이른바 ‘소리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첫 번째 목적지는 세계 자연유산인 한국의 갯벌, 그중 서천으로 떠나는 소리 여행이다.

그럼 이 글을 읽기 전, 귀의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어보자. 소리에 대해 좋았던 기억을 더듬고 새로운 소리를 연상해 보며 만드는 또 다른 차원의 여행 감각. 여러 감각을 통해 우리의 느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우리 안에 자리 잡은 감각은 더욱 기민해지고 영감도 더욱 깊어질 것이다. 글 김영일

세계 자연유산인 한국의 갯벌, 서천

2021년에 세계 자연유산에 한국의 갯벌이 등재되었다. 보도된 내용에 따르면, 세계유산위원회는 한국의 갯벌이 지구 생물 다양성의 보존을 위해 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서식지 중 하나이고, 특히, 멸종 위기 철새의 기착지로서 가치가 크므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 OUV)가 인정되는 바, 세계 자연유산으로서 인정한다 말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갯벌은 총 네 곳으로 충남 서천의 서천 갯벌, 전북 고창의 고창 갯벌, 전남 신안의 신안 갯벌, 전남 보성과 순천에 걸친 보성-순천 갯벌이다.

국내 갯벌 지도

출처=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리스트

서천 갯벌로 떠나는 소리 여행

서천 갯벌은 IUCN*(International Union for Conservation of Nature and Natural Resources, 세계자연보전연합)에서 지정한 적색목록 등급에 해당하는 넓적부리도요 등 바닷새 23종 30만 4천여 개체의 서식지다. 서천은 정말 한적한 곳이어서 소리 여행지로서 꽤나 좋은 환경이었다. 산업화 과정에서 제외된 도시로 자연과 문화유산이 보존된 이곳. 지리적으로 금강과 서해바다가 만나는 끝자락에 위치해 자연에 먹거리가 풍부하고 산세도 험하지 않다. 너른 들판도 있어 예로부터 풍족한 자원 속, 자연 중심의 문화가 발달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자연 유산에 등재될 만한 특별한 자연환경을 지닌 셈.

선도리갯벌체험마을
저멀리 쌍도가 보인다

서천의 갯벌에 다다르자 눈앞에 섬 하나가 보였다. 쌍도는 한 연인의 애틋한 전설을 담은 곳이다. 쌍도를 마주 보며 밀물이 꽤나 진행된 시점, 이미 만조에 가까운 수위였다. 간조의 정점에는 해변에서 쌍도 까지의 갯벌 길이 모습을 드러내게 되기에 간조 때까지 기다려보기로 했다. 이미 해는 붉게 저물고 있는 시간이었다. 지는 해가 수놓은 은은한 그림 같은 구름과 아름다운 하늘을 보며 나를 감싸며 다가오는 파도 소리를 감상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의 소리, 해변 가까이에 다다른 파도의 소리, 다시 바다로 향해 나아가는 파도의 소리, 돌에 부딪혀 흐르는 소리, 거품을 남기고 간 자리에서 나는 소리, 파도가 돌아간 후 모래에서 나는 소리. 마치 하늘의 그라데이션처럼 무척이나 부드럽고 배려심으로 가득한 소리가 다가왔다. 자연의 음악처럼 구름과 하늘 빛 그리고 멀리 산과 바다, 해변의 모래가 일제히 연주되는 소리는 문득 오케스트라와 같이 들려왔다.

일몰

쌍도로 향하는 길목에 앉아 점점 차오르는 수면과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사색을 즐겨본다. 백색소음과도 같이 아무 생각도 없이 모두 사라지는 소리 속으로. 어쩌면 나 자신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더욱 수월해지는 건 아닐까. 어느새 머릿속은 가벼워지고 짊어지고 갔던 모든 숙제 또한 잊게 된다. 소리 채집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떠났지만, 어쩌면 가장 중요한 건 그곳에서 내가 느끼고 깨달은 모든 것이 아닐까.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얻는 가장 큰 선물은 나를 비우고 다시 채울 준비를 한다는 것. 어느덧 태양의 꼬리는 더욱 길어진다. 가끔 해변을 오가는 사람들의 정겨운 대화와 노랫소리들이 하염없이 간조를 기다리는 마음을 달래준다. 파도의 리듬에 맞춰 사람들이 소리의 흔적을 가져온다.

밤바다에 앉아

간조를 기다리며
간조를 기다리며

드디어 만조를 지나 간조를 향하는 시각.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물에 가려졌던 길이 달빛에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해안에서 1km 정도 떨어진 쌍도를 향해 더듬더듬 나아갔다. 행여 갯벌에 발이 빠질까 걱정하며 조그만 헤드랜턴에 의지해 나아간다. 드러난 땅을 한걸음 한걸음 밟으며 멀리서 비치는 오징어잡이 배의 희미한 빛을 느껴 본다. 아직 바다로 나가지 못한 바닷 물에선 발걸음을 재촉하는 소리가 들린다. 저편 해안에는 파도가 부딪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밤바다

잠시 후 달빛도 별빛도 모두 보이지 않게 된 순간. 바다가 내어준 자리에는 갯벌에 뿌리내린 무수한 생명의 소리가 가득했다. 보이는 것이 모두 사라져 오롯이 청각에 모든 감각을 집중하는 순간. 소리 여행의 클라이막스가 열렸다. 갯벌을 가득 채운 생명의 소리는 저 하늘의 별처럼 나에게 쏟아져 내리는 듯했다. 작은 생물들이 힘주어 내는 소리가 이렇게 잘 들릴 줄이야. 갯벌에 많은 종의 새들이 오는 것도, 이 아이들의 소리가 일제히 들려서 일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이번 소리 여행의 정점이었다.

밤바다

서천에서 맞이한 아침

다음날 아침, 새롭게 다가오는 갯벌의 소리들을 기대하며 지난밤의 기억을 뒤로하고 아침의 소리에 집중해 본다. 먹이를 찾느라 분주한 새들을 위해서인지 바다는 아주 천천히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갯벌을 채우기 시작한다.

서천의 아침

나지막이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아침의 전주를 시작하고 새들은 아침 식사를 위해 이곳저곳 분주히 움직인다. 이방인인 나 자신의 소리마저 기꺼이 품어주는 갯벌의 넉넉함에 감사함을 느꼈다.

서천의 아침

보통은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거센 바람 소리 조차도 이 순간만큼은 너그러이 감상을 하게 된다. 모두가 잠든 밤에 가끔 허공에 울리는 구슬픈 새소리, 이따금 바람에 흔들리는 쌍도의 나뭇잎 비비는 소리, 귓가의 솜털을 간질이며 지나는 바람 소리, 섬에 포옥 안겨 있는 어미 새의 둥지 같은 곳으로 모여지는 소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에 가능한, 온전히 귀로만 느낄 수 있었던 자연 유산의 하모니가 생명의 아름다움과 진정한 힐링을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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